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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원

Torrent green93 2022. 8. 1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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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원

정원이란, 보고 산책하기 위해 수목을 심고, 분수・화단을 만드는 등 인공적으로 만든 시설을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자연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 강・연못・언덕 등을 만들어 나무나 화초를 심어 놓은 것도 있다.

1. 일본 정원의 역사

■ 아스카・나라시대

飛鳥寺

일본에서 정원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니혼쇼키日本書紀의 스이코推古 천황 34년(626) 항목에서이다. 이 책에서 이 해에 소가노 우마꼬蘇我馬子가 죽었는데, 아스카飛鳥강의 호반에 있었던 우마꼬馬子의 집의 마당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연못에는 작은 섬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 정원이 유명하였다고 하는데, 광장으로서 실용적으로 사용되던 마당에 연못을 만들고, 작은 섬을 만들어 관상의 대상으로서 정원을 만든 것이었다.
또,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졌을 대, 숭불을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논란이 일어났지만, 숭불측인 소가蘇我씨가 결국 우세해, 아스카데라飛鳥寺가 건립되었다. 정원이 소가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정원의 기술도 백제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추정된다. 또 다른 기록은, 텐무天武 천황의 태자, 쿠사카베草壁태자의 요절을 애도해 지어진 詩가 만요오슈우万葉集 2권에 실려져 있는데, 이 詩에서 쿠사카베草壁 태자의 정원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있어 그 정원을 미루어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 정원에도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에는 바위로 장식을 하고 그 바위사이에 철쭉이 피어있다고 한다. 또 연못에는 작은 섬이 있어, 바다의 풍취를 자아내고자 했다. 이런 방식은 후대의 일본 정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아스카飛鳥궁이나, 헤이제이쿄오平城京 터의 정원 발굴이 진척되어, 문헌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헤이제이쿄오平城京에서는 길이 55m, 최대 폭5m의 길게 구비진 바닥에 자갈을 깐 연못이 발굴되어, 공적인 연회가 개최된 정원으로 주목되었다.
■ 신덴즈쿠리寝殿造의 정원

大沢池


8세기말 수도가 헤이안쿄오平安京로 천도되는데, 쿄오토京都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맑은 물이 풍부한 경승지였다. 가는 곳마다 숲이나 연못, 샘물이 있었으며, 삼면의 산들은 고생대에 속해 완만한 기복이 이어졌고, 또 분지에도 작은 구릉이 점재하였다. 이 고생대의 산하에서는, 아름다운 정원석과 흰 모래를 얻을 수가 있었다. 지형이나 재료 면에서, 정원을 만들기에는 최적지라 할 수가 있었다. 9세기는 천황의 이궁, 퇴위를 하여 훌륭한 정원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쿄오토京都의 북서쪽에 있는 오오사와大沢 연못은 사가嵯峨천황의 이궁으로서 만들어진 것으로, 북쪽 편에 작은 섬이 2개가 있고, 이 부근에 지금도 정원석이 산재한다.
10세기 중반이 되자, 후지와라藤原씨가 광대한 장원을 바탕으로 영화를 누렸다. 이 무렵은 ‘오래된 것’보다는 ‘현대의 것’을 찾기 시작하는 전환기로, 생활 자체가 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전래된 회화도 이윽고 일본화되어, 소위 말하는 ‘야마토에大和畵’가 성립된 것도 이 시기였으며, 한시와 더불어, 가나仮名로 적힌 문학작품이 적혀진 것도 이 시기였다. 귀족의 주택이나 정원에도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귀족의 주택은 신덴즈쿠리寝殿造라 불려졌는데, 넓은 것은 사방이 100m가 넘는 것도 있었다. 문은 동편이나 서편에 있었고, 남쪽은 넓은 정원이 만들어졌다. 즉 주택은 남향으로, 앞이 정원으로 구성되는 형태로 남문이 없었던 점은 중국의 형식과 다른 형식이었다. 정원에는 흰 모래가 깔리고 연중행사 의식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가운데 문의 남쪽은 연못을 바라보고 츠리도노釣殿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납량, 달구경 시의 연회 등에 사용되기도 하고, 뱃놀이 때에는 출발지로 사용되었다.

和歌山城의 정원 紅葉渓의 釣殿


■ 정토교 (浄土教)정원의 형성
헤이안平安 시대 중기(10세기) 이후, 불교는 국가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변하고, 귀족의 개인 사찰이 증가하였다. 주택 안에도 불당을 세우고, 또 불당이 별장으로서의 기능도 겸했다. 후지와라노 미찌나가藤原道長의 호오죠오지法成寺, 후지와라노 요리미찌藤原頼通의 뵤오도오인平等院을 비롯해 11세기에서

平等院


12세기를 통해 바로 눈앞에 극락정토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시대의 풍조가 반영된 정원이 형성되었다.

毛越寺


이 형식의 가람배치에는 연못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참배자는 남문을 지나 연못에 걸쳐있는 다리를 건너, 섬을 거쳐 사당이나 불당에 도착하도록 설계되었다. 화려한 사당의 탑이 연못에 비친 모습은 바로 극락정토를 연상시킨다고 믿었다.

金閣寺



11세기 말부터 거의 80년간에 걸쳐 시라카와인白河院의 토바리큐우鳥羽離宮가 조성되었다. 토바는 헤이안쿄오平安京의 남단인 카모鴨강에 인접한 풍광이 좋은 지역으로, 종래부터 별장지로 애용되었다. 이 지역에 동서 1.5㎞, 남북 1㎞에 이르는 이궁이 만들어졌다. 연못은 동서 600m, 남북 800m나 되었고, 여러 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이는 시라카와인白河院이 자부심을 가지고 만든 정원으로, 연못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주택과 안라쿠쥬우인安楽寿院 등의 당탑(堂塔; 예배의 대상을 모시는 사당)이 공존하는 정토형식의 구성되어 있다. 이런 정토형식의 건축과 정원은 12세기 초기에는 쿄오토京都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지방의 히라이즈미平泉에서 만들어졌고, 현재도 이 정원의 유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후지와라노 모토히라藤原基衡가 만든 모오츠우지毛越寺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새로운 돌담도 발굴이 되었다. 또 모토히라基衡의 부인이 만든 관자재왕원, 딸이 만든 시라미즈白水 아미타당은, 정원을 발굴, 복원해서 일반 공개되고 있다.
일본의 무가정치를 제일 처음 시작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도, 카마쿠라鎌倉에 정토식 정원의 형식인 에이후쿠지永福寺의 정원을 만들었다. 13세기 초기에는 쿄오토京都의 북서쪽에 사이온지 킨츠네西園寺公経가 사이온지西園寺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절이면서도 킨츠네公経의 별장이기도 하였다. 큰 연못을 중심으로 많은 사당과 주택이 배치되었는데, 14세기 말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 장군의 것이 되면서 키타야마덴北山殿 또는 키타야마北山 산장이라 불리고, 유명한 금각이 건립되었다. 요시미츠義満의 사후, 그의 법명을 따라 로쿠온지鹿苑寺(통상 金閣寺)로 불리게 되었다.

西芳寺의 정원


■ 선원禅院의 정원
12세기말 송나라로부터 선종이 전해졌는데, 선종사원의 양식이나 정원은 한 세기를 거쳐 겨우 일본식으로 소화되면서 정착되었다. 이 시대의 중심인물이 무소오夢窓 선승이었다. 무소오夢窓 스님은 자연을 사랑하여 가는 곳마다 명 정원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사이호오지西芳寺의 정원은 선종의 세계관으로 구성된 걸작이라 평해진다. 이 정원이 일본의 정원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절은 산의 기슭에 만들어지고, 연못과 그 위의 산의 사면을 이용한 선사의 정원으로 나누어진다. 또 이 선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정상에 슈쿠엔테이縮遠亭란 휴식을 위한 정자가 있었다. 연못에는 3개의 섬이 있고, 섬에는 흰 모래가 깔리고 소나무가 심겨졌으며, 정자가 있었다.

■ 료오안지龍安寺의 정원

大徳寺塔頭大仙院의 정원


14세기 말부터, 5산을 중심으로 선승들 사이에 문학이 성행하고 또 송나라로부터 수묵산수화가 전래하여, 귀족들을 포함하여 시모임을 위한 서클이 만들어졌다. 이 서클 모임의 장소로 선사의 서원이 사용되는 일이 많았고, 따라서 서원의 정원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 작은 서원의 앞뜰의 작은 공간에, 자연의 산수를 응축한 정원을 만들었는데, 이는 수묵산수화의 기본과 같은 성격이었다. 바위를 2, 3개 겹쳐 산 또는 폭포를 나타내고, 모래로 강이나 바다를 상징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쿄오토京都의 다이토쿠지大徳寺 다이센인大仙院의 정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이 이상 생략할 수가 없다고 할 만큼 재료를 단순화한 료오안지龍安寺의 정원과 같은 걸작도 탄생하였다.
다이센인大仙院의 정원은 서원의 동편에 위치하며, 100㎡ 정도의 넓이의 정원에 중앙 부분에 잔디를 심고, 바위산을 연상시키는 2단의 돌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흰 모래로 표현하고 있는 강에는 돌다리를 걸쳐 바위섬을 만들었다. 이는 모두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구성이라 하겠다.
다이센인이나 료오안지의 정원은 모두 카레산스이枯山水라 부르는 기법으로, 물을 사용하지 않고 물의 느낌을 가지게 하는 데 특징이 있다. 이는 정원에는 물이 불가결한 것이란 사고가 근저에 있다. 일본에서는 정원을 山水라고 부르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龍安寺 方丈庭園
太山寺 安養院의 枯池式枯山水



■ 다도 정원의 발생
15세기 후반부터 쿄오토京都, 사까이堺의 서민들 사이에 다도가 유행했다. 차를 마시고, 또 다기를 감상하며 주객의 사교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센노리큐우千利休의 말년에 이르러 초암풍의 다도는 완성되었는데, 전원・산간의 정취를 내는 것을 주제로 하여 차실은 농가를, 정원은 산사의 오솔길의 정취를 표현하고자 했다.
수목은 산에 있는 상록수를 심었으며, 인공적 가미를 가장 금기시하였다. 마을에 있는 나무도 사용하지 않고, 인공을 피하고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자 했다. 다도 정원의 가장 핵심이며 기본 골격은 징검다리와 쵸오즈바찌手水鉢 이며, 나중에 석등이 밤의 다도 모임을 밝히는 조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쵸오즈바찌手水鉢나 석등은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옛것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다도 정원은 오랜 기간 비바람을 맞아 풍화되어 이끼가 생기는

青蓮院의 쵸오즈바찌


그런 고풍의 취미를 즐기는 공간이었다. 다도 정원은 로지露地라고 하여, 다실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로지는 다실에 가는 길이여서, 징검다리를 따라 걷게 만들어져 있다. 어디까지나 걷기 위한 정원이지, 감상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서민들에 의해 육성된 다도는, 센노리큐우의 제자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나 코보리 엔슈우小堀遠州와 같은 무사들에 전해질 무렵에는 내용이 적잖이 변용되었다. 로지는 넓은 다이묘의 저택

桂離宮


안에 만들어졌기에 한층 넓어졌다. 넓은 로지는 도중에 울타리를 하나, 둘 만들어 변화를 주었고, 또 감상의 소지도 충분히 많아졌다. 평지에 가까운 로지가 언덕, 개울이나 연못까지 만들고, 또 석등이 중요한 볼거리로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여기에 신덴즈쿠리식 정원의 전통이나 서원 정원의 흐름이 합류하여 만든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 코보리 엔슈우小堀遠州였고, 정원으로는 카츠라리큐우桂離宮의 정원이 현존한다.

■ 회유식 정원의 유행 - 다이묘大名 정원
17세기 초,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전국의 다이묘大名를 통제하기 위해 산킨코오타이参勤交代라는 제도를 고안하였다. 이는 1년은 에도江戸에서 장군을 보필하고(参勤), 그 후 1년은 자신의 영지에 돌아가는(交代) 것으로 다이묘들의 모반 등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를 위해서 다이묘들은 에도江戸와 영지, 양쪽에 정원을 가진 저택을 만들었다. 에도江戸에 만들어진 정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코이시가와 코오라쿠엔小石川後楽園이 있다. 이 정원은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가 명나라의 朱舜水를 초빙하여 설계하는데 참가시키기도 하여, 중국 ․ 유교적인 취향이 농후하다. 이 정원은 연못을 회유하면서 감상하게 만들어져 있고, 정원 내의 경관은 자신이 좋아하는 경승지를 모티브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경관을 한층 더 즐기기 위해서 휴게소로서의 다실이나 사당을 세우고, 순로에 따라 회유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二条城 二の丸御殿庭園

 

小石川後楽園

17세기 중기에 들어가면 쵸오닌町人의 문화가 꽃피고, 화려한 풍조가 유행하는 시기를 맞이해, 넓게 잔디를 깐 밝은 정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중세와 같이 연못이나 개울에도 석담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바위를 사용할 때에도 스테이시捨石라고 하여, 요소에 1개만을 버려둔 것처럼 보이게 배치하였다. 둥근 형태의 바위가 애호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세기 초, 오카야마 항슈岡山 藩主 이케다 츠나마사池田綱政가 14년의 세월에 걸쳐 만든 오카야마岡山시의 코오라쿠엔後楽園은, 잔디와 연못을 주축으로 한 개방적인 공간이 편한 느낌을 주는 정원으로, 현재 일본의 3대 명원으로 손꼽히고 있는 명원이다.

栗林 공원
後楽園과 岡山城


시코쿠四国 타카마츠시高松市의 현재 리츠린栗林 공원인 리츠린소오栗林荘도 역시 다이묘大名의 별장으로 만들어진 정원이었다. 이 리츠린소오를 조성한 마츠타이라松平씨가 미토水戸의 토쿠가와케徳川家를 계승하였을 때, 코이시카와 코오라쿠엔小石川後楽園을 현대풍으로 개조를 한 것도 같은 18세기 초기 무렵이었다. 같은 시기에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吉保가 만든 에도의 리쿠기엔六義園은 와카和歌 취향이 물씬 풍기는 밝은 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2가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원예의 유행이 두드러졌다. 에도에서는 한 지역이 화원으로 가득 차, 에도 시민의 명소가 되었다. 이런 풍조는 다이묘의 정원에도 파급되어,

六義園


코이시가와 코오라쿠엔小石川後楽園이 다시 개조되고 정원 내에 화초가 무성하게 되었다. 또, 에도의 스미다가와隅田川의 동편인 무코오지마向島에는 쵸오닌町人들이 만든 햣카엔百花園은 화초로만 구성된 상업적 영업을 하는 정원이었다.

百花園

둘째는, 다이묘 정원으로 서민들에게 개방된 정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미토水戸의 카이라쿠엔偕楽園이나 시라카와白河의 난코南湖가 대표적인 정원으로 들 수가 있다. 서민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의 공원으로 향하는 효시가 된 점에서 의의가 있다.

■ 메이지明治 ․ 타이쇼오大正 ․ 쇼오와昭和

無鄰庵

메이지明治시대에 들어가면 서양의 영향으로 생활양식이나 건축이 변하고, 따라서 정원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옛 다이묘나 정부의 고관, 신흥 실업가들이 잔디에서 연회모임을 갖기 위해 대규모의 정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896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에 의해 쿄오토京都의 난젠지南禅寺의 서편에 만들어진 무리안無鄰庵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정원을 시공한 오가와 지헤이小川治兵衛는 그 후, 헤이안 진구우 신엔平安神宮神苑, 오오사까大阪의 스키토모케住友家정원, 나가하마長浜의 케이운칸慶雲館 정원 등의 명원을 만들었다.
타이쇼오大正에서 쇼오와昭和에 걸쳐서는 소정원 시대로 접어든다. 소정원은 자연주의의 정원으로 꾸미기는 곤란하여, 만든 이의 주관이 뚜렷한 조형적, 장식적인 정원이 만들어졌다. 화가인 야마모토 슌쿄山元春挙와 조원가 모토이 마사고로本位政五郎가 만든 오오츠시大津市의 로오카 센스이소오蘆花浅水荘는 문인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고 말해질 정도로 풍류가 있는 정원을 만들었다.
타이쇼오大正 시대에는 조원학이 일어나, 정원협회를 중심으로 옛 정원을 연구하고, 새로운 정원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쇼오와昭和에 들어와서는 2가지의 두드러진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첫 번째는 사원에 많은 카레산스이枯山水를 만든 시게모리 미레이重森三玲로, 자연주의적인

蘆花浅水荘

정원을 비판하면서 상징적인 정원을 건설하였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쇼오와昭和의 초기에 이이다 토오키飯田十基가 추진한 잡목의 정원으로, 그 후 오가타 켄조오小形研三에 계승되어, 도시의 인공화와 함께 급성장하였다. 2차 대전 이후, 건축의 근대화에 따라 공공 건축의 정원이 더욱 발달하였다. 나까지마 켄中島健의 일본예술협회 회관의 정원, 이케하라 켄이찌로오池原謙一郎의 이리야마찌入谷町 미나미南 공원 등이 대표적인 정원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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